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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과 심리학

무의식적 회피? ‘아무거나’의 진짜 뜻

by 게으른 여행자 2025.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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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먹자’는 말,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겁니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단순한 배려를 넘어서 무의식적 심리 패턴이 숨어 있습니다. 특히 선택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갈등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는 사람일수록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하죠. 본 글에서는 실제 여행 중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아무거나’라는 말 속에 담긴 심리학적 의미, 그리고 선택 회피와 감정적 피로에 대해 깊이 있게 탐색해보려 합니다.

싱가포르 가족여행에서 터진 ‘아무거나’ 사태

몇 년 전, 부모님과 함께 싱가포르로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날씨는 덥고 습했지만, 새로운 경험에 들뜬 마음으로 거리 곳곳을 걸어 다녔죠.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모두가 배고프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메뉴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제가 눈여겨보던 트라피자(Trapezza)라는 현지 스트리트 피자 가게가 보였습니다. 피자도 이국적이고 맛있어 보였고, 무더위에 딱 어울릴 것 같아서 “여기서 먹자!”라고 기쁜 마음으로 말했죠. 하지만 부모님은 익숙한 한식이 먹고 싶다며 근처에 있다는 한식당을 주장하셨습니다. 서로의 의견이 갈렸고, 그 자리에서 십 분 넘게 "뭐 먹을지"로 실랑이가 이어졌습니다.

사실 단순한 메뉴 고르기였지만, 상황은 점점 감정적으로 흘러갔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점점 말이 없어졌고, 결국 “그냥 아무거나 먹자고!”라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해버렸습니다. 당시엔 단순히 더워서, 배가 고파서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말은 단순한 피로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계속되는 선택과 의견 충돌에 지쳐버린 저는 ‘결정’ 자체를 회피하고 싶었던 겁니다. 어쩌면 그 순간 저는 갈등을 피하고, 책임을 넘기고 싶은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아무거나’라는 말로 튀어나왔던 것이죠.

이 경험은 나중에 가족들과 대화를 하면서 풀렸지만, 그때의 저는 분명히 ‘선택하는 것’에 지쳐 있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소중한 시간에 감정이 상할 뻔했던 아찔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만든 피로: ‘선택피로증후군’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상상 이상으로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아침에 입을 옷부터 점심 메뉴, 스마트폰 앱 알림에 반응할지 말지, 카페에서 고를 음료, SNS에 올릴 말까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의 선택을 반복합니다. 이런 선택들이 쌓이게 되면 사람의 뇌는 점점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며, 결국 ‘선택 피로(choice fatigue)’라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 개념은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의 저서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에서도 등장하는데요, 그는 “선택의 자유는 때때로 행복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결정에 부담을 느끼고, 잘못된 선택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느낀다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무거나 먹자’는 표현은 단순히 귀찮음이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 나오는 말일 수 있습니다. 특히 일상에서 늘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면, 가벼운 메뉴 결정조차 큰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죠.

더불어 이는 단순히 음식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여행지를 정할 때, 친구와 영화를 볼 때, 연인과 데이트 코스를 정할 때도 ‘네가 정해’,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와 같은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말들은 결국 선택에서 오는 책임과 감정의 부담을 피하려는 심리적 신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족 간의 식사 메뉴 선택으로 인한 갈등 장면을 표현한 일러스트

무의식적 방어기제로 작용하는 ‘결정 회피’

심리학적으로 ‘결정 회피(decision avoidance)’는 하나의 방어기제로 볼 수 있습니다. 방어기제란 자아가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무의식적인 심리 작용을 말하는데요, 결정 회피는 특히 불확실성과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이걸 선택했다가 상대방이 싫어하면 어떡하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소리를 듣게 될까?’ 하는 걱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선택을 망설이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끝에 나오는 말이 “아무거나 괜찮아”인 것이죠. 사실은 괜찮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특히 가까운 가족, 연인과의 관계에서 이런 패턴은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저 역시 싱가포르에서의 사건 이후, 가족과 외식을 할 때면 한동안 계속해서 “그냥 너희가 정해”라고 말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게 갈등을 줄일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실상은 감정을 더 억누르고, 나중엔 서운함으로 번지게 만들더군요.

결정 회피는 순간적으로는 갈등을 피하게 도와주지만, 반복될수록 자신의 욕구를 말하지 못하고 관계 안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왜 이 말을 반복하는지, 정말로 아무거나 괜찮은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는 시간입니다.

‘아무거나 먹자’는 단순한 말 같지만, 그 안에는 선택 피로, 갈등 회피, 감정 부담 등 다양한 심리 작용이 숨어 있습니다. 반복적인 결정 회피는 관계에서의 오해와 감정 누적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결국 진짜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제는 ‘아무거나’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보는 습관을 들여보는 것은 어떨까요? 비록 작은 결정이라도,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연습은 인간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지고 만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선택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다음번에 “아무거나”라는 말이 떠오르거든, 한 번 더 생각해보세요. 그 안에 숨어 있는 진짜 내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